그러다 문득 그 이면을 생각해 본다. 세계의 석학들은 인류가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발전이 현재에는 큰 이익과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재앙으로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의 기후 및 환경문제, 인구폭발, 원전사태 등 각종 재앙, 빈부의 양극화, 청소년 문제, 가족의 붕괴 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경쟁과 발전의 성과인 첨단, 그 중에서도 가장 앞부분에 서있는 의료 분야는 어떤 식으로 변해 왔으며, 10년 후에는 어떻게 달라질까? 본인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을 시작한 1981년만 해도 의사가 의료의 중심이었다. 의사는 전문 분야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사회에서 무한한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환자는 그런 의사의 지시와 처방을 신뢰하고 받아들였다. 또한 의사는 자신만의 오래된 경험을 바탕으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환자의 아픔을 어루만졌으며, 때로는 먼 길을 뛰어다녔고, 아픈 이들을 돕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때, 의료는 존경과 헌신의 공간이었다. 

30년이 흘렀다. ‘꿈 많은 한 청년이 노련한 중년이 되었다’는 말로 간단히 표현하기에 그간의 변화는 숨이 찰 정도로 엄청나다. 앞으로 닥칠 변화를 생각하면 역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문제 중심의 술기, 전자의무기록 등이 보편화되었으며 이제는 원격진료의 장이 열리고 있다. 근거중심의 의학이 소개되면서, 의사의 고유한 경험보다는 통계학적 수치를 잘 다루고 이를 환자에게 응용할 줄 아는 의사가 더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전 세계 학회장을 휩쓸고, 한번 초청하려면 1년 이상 걸리는 임상시험가들은 그야말로 대 스타가 된 것이다. 그들은 환자의 치료방법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직접 진료하는 환자는 별로 많지 않다. 그들이 접하는 것은 전 세계 의료 기관의 분석 자료 속 환자들이다. 모두 디지털 환자인 것이다. 

임상진료 현장에서도 서너 대의 모니터로 벽을 쌓아 환자를 가린 채 진료하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분야보다 앞서 발전하는 의료 장비 덕분에, 진단은 물론 치료 역시 장비 위주가 되어 가고 있다. 고가의 첨단 의료 기기 경쟁 속에서 그 옛날 환자를 어루만지던 우리 스승님들의 손, 아날로그 의사들의 손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시술과 수술도 다수의 장비와 로봇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심화되고 있다.

여기서 ‘10년 후 우리 의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발전시킨 과학은 그 반대급부로 엄청난 위험과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료는 과연 안전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나아갈 것인가? 아닐 것 같다. 

요즈음 부쩍 조바심이 난다. 현재 30~50대의 기대 수명은 100세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100세 시대의 도래라며 좋아해야 할까? 우리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사는 동안 암에 걸린다고 한다. 또한 지금 50대가 100세를 목전에 두게 되는 2050년 주요 경제활동인구는 약 45%까지 감소한다는 예측이 있다. 시야를 넓혀 보자. 이미 70억 이상의 인구가 얹혀 있고, 그 무게를 힘겨워 하는 지구는 과연 안전할까? 이런 상황에서 의학의 책임은 없는가? 계속 효율만 주장해도 괜찮은 것일까? 본인이 앞장서 추진해 온 디지털병원, 스마트병원은 정말 편리하다는 장점만 있는 것일까? 

향후 10년 간 우리의 진료환경은 더욱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병원의 입원치료 기능은 줄어들고 재택 혹은 원격 진료로 대부분이 대체됨으로써 많은 환자들이 병원을 직접 찾지 않고도 진료를 받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의료 전문 영역의 담장이 더 낮아지며, 평균수명 증가를 포함한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의료의 사회 비용은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리라 예상한다. 결국, 국민 건강과 복지 분야의 혼란이 가중됨은 물론 국가 경제 역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상,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해 보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 질병을 다루는 데 있어 발생 후 치료가 아니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예방에 더 투자해야 한다. 생활 방식에 있어서는 디지털의 노예가 되는 대신, 적극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환경, 식생활, 운동 등을 접하며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방에 실패해 질환에 걸린다 해도 조기진단에 집중함으로써 진행 후 완치를 위한 치료 비용을 줄여야 하겠다. 물론 국가도 고령화 사회의 국민 의료 대책을 강구하고 지속적인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선에서 진료에 임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발전의 속도를 급격히 줄일 수는 없다.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 모두가 나서서 병원 간 무모한 경쟁을 말릴 시점이다. 겉만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각자 안을 한번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과연 이 문제에 정답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기본적 입장, 방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심각한 재앙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해 본다. 어릴 적 사랑하는 동생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백혈병을 연구하고 치료하기로 결심한 소아과 의사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막연히 주위의 권유나 여러 사정에 이끌려 어린이를 진료하는 의사와는 시작이 다르다. 같은 의사 가운을 입고는 있지만, 시작이 다른 만큼 그 결과도 다르지 않을까? 이런 입장이나 취지의 차이가 저 멀리 있는 우리의 결과를 바꾸지 않을까?

디지털세계에서 환자들이 인간적으로 존중 받고 있는지,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컴퓨터에 나타난 증상들의 열거나 첨단 진단장비를 통해 얻은 소견 등의 근거를 바탕으로 처방을 출력하는 것만으로 우수한 진료라 치부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본인은 외과의로서 1만 명 이상의 유방암 환자를 수술해 왔다. 그들은 정석대로 항암 및 방사선 치료 등 근거 중심의 원칙적인 치료도 잘 받았으며 생존 결과 역시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뒤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환자를 더 보면 볼수록 ‘모르겠다’는 생각과 예상 밖의 결과에 한계를 느끼는 건 왜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방법이나 근거들로 진단, 치료하는 것이 진정 충분하며 그것만이 전부일까? 혹시 눈을 맞추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함께 공감하는 것이 환자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설사 생존과는 무관하더라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의사와 대화를 하고 눈빛으로 교감한다면 질병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지지 않을까? 벼랑 끝에 서 있더라도 누군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 자기를 지켜주고 손을 내밀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끝까지 가질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닥칠 그 순간이 얼마나 편안해 질까? 암환자들은 치료만 받으면 끝일까? 암환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날들은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이제 의사들이 역할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환자들이 병원을 질병으로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 휴식처나 휴양지, 별장처럼 편히 여길 수 있다면 병의 무게 역시 한결 가볍게 느끼며 치료 과정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마구 질문을 던져본다. 이 질문들은 나만의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관된 답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다른 차원의 배려가 오로지 질주하기만 하는 의료 환경에 작지만 인간을 배려하는 흐름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닐지, 그리하여 서로가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배려의 공간이 되지 않을지 생각해 본다. 

2012. 5. 31 
서울대학교병원 암진료부원장 노 동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