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영 교수가 책 한 권을 내민다. 얼마 전 나온 서울대병원 유방암환우회인 ‘비너스회’ 10주년 기념책자다. 책 속에는 10년간 비너스회의 활동을 담은 사진들이 가득하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사진 한 장. 70여 명의 여성들 사이에 남자는 두 명, 그 중 한 사람인 노동영 교수를 중심에 두고 여인네들이 포즈를 취한 모습이 심상치 않다. 환자들이 노 교수를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떠받든다는 풍문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이는 환자들의 표정은 ‘신자’보다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오빠 혹은 남동생을 만난 누이의 그것에 가깝다. 노동영 교수 스스로도 책자에 실린 글을 통해 자신을 교주에 비유하며 흉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왕 교주가 된다면 군림하고 명령하는 교주가 아니라 웃기고 망가질 줄 아는 광대 같은 교주가 되겠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광대라는 단어는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비너스회가 주관하는 야유회, 수련회, 노래교실, 파티 등 행사가 있으

면 기꺼이 환자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

진료실에서는 병을 진단하고 치료한다면, 야유회나 등반대회에서는 환자의 생활을 챙긴다. 병이 병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병으로 인해 생활이 망가지고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에 문제다.

노 교수는 환자의 삶에 병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치료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당장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 환자가 예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료실이 아닌 산에서 혹은 공원에서, 그는 환자에게 생활상의 조언도 하고 환자의 하소연도 듣는다. 인터넷 상담도 그런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다. 게시판에 올라온 상담 글에 답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은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사연은 길어도 요점만 쓰니까 금방 해요. 핵심만 말해주는 것을 환자들도 더 좋아하죠. 그렇다, 아니다, 된다, 안 된다, 이렇게 써주니까.”

그동안 그가 답을 달아준 상담은 2만 5천 건에 달한다. 10년간 꾸준히 해온 결과다. 진료실 안과 밖,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뤄진 만남 때문에 그는 환자들과 더 많은 접점을 만들 수 있었고 그런 접점은 연구자로서 진료자로서의 역량에도 큰 도움이 됐을 터다.

“어떤 사람들은 의사가 진료만 하면 됐지, 라고 하는데 잘못된 생각이죠. 환자를 가까이 하면 의사로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거든요. 환자들도 의사가 진료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옆에 있다는 것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환자가 나아서 어떻게 사는지 죽음의 문턱에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사람을 치료할 수가 없다. 환자의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하면 의사의 역할은 환자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일 이상은 아니라고 믿는다. 모든 의사가 자신처럼 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 그가 하는 활동도 앞으로는 의사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연구하랴 환자 보랴 시간도 없을 텐데 주말에는 이런 환우회 행사에 참여하니 개인적인 시간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단다. 예전에는 자정 넘어서 퇴근했지만 요즘은 10시쯤이면 퇴근한다. 3월에 개원하는 암센터 준비까지 일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6시부터 일을 합니다. 20년 넘게 남들보다 세 시간 먼저 일했으니 지금 죽어도 남들 평생 일한 만큼은 될 걸요. 그렇게 열심히 했어요. 우리 때야 무조건 남보다 잘하고 뭐든 잘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남들은 그에게 욕심이 많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욕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이 그를 잡고 놔주지 않는다. 관여하고 있는 일들이 이제는 저절로 굴러가고 있다. 노 교수가 일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노 교수를 컨트롤한다고나 할까.

“일이 발목을 잡는다고나 할까요. 이젠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일이 들씌워지는 거죠, 하하. 환자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처음에는 유명해지는 것이 좋았는데 이제는 환자에게 발목이 잡혀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지금은 새 외래환자를 받지 않는 것으로 일을 거의 강제로 조절하고 있죠.”

뒤도 안 보고 달려온 그지만 가끔 좋아하는 것만 열심히 하는 젊은 의사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때로는 경쟁력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점이 그들의 경쟁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단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이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가 됐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 역시 그 충고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그런데 이젠 일 말고는 제가 도움이 되는 데가 별로 없거든요. 가족들도 제가 없는 삶에 익숙해졌고요. 그래서 더 일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 때로 진료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퇴근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분들이 부럽기도 해요.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몰던 사회 분위기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 소신을 지킨 분들이잖아요. 저처럼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다보니 일만 하게 된 것보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죠. 제가 소개할 선생님이 그런 점에서 멋지게 삶을 디자인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노동영 교수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임재양(임재양외과의원)

“누가 부럽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마자 임재양 원장이 떠올랐죠. 대구에 개원하신 분인데 나이는 저랑 동갑이고, 경북의대 나오셨을 거예요.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은 다 갖고 계신 분이죠. 유방암학회에서 알게 됐고 학회에서도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 활동하시죠.

매년 보내오는 연하장은 가족사진을 넣어 디자인할 정도로 가정적인 분이시기도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하십니다. 얼마 전에는 환자들을 위해서서도 체계적으로 공부하러 외국에 가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준비하고 계실 겁니다. 지금도 의사로서 모범적인 자세를 잃지 않으신 거죠.

특히 원장님이 부럽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 그 분 모친이 돌아가셨는데, 간단한 엽서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임 원장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을 적어서 보내셨더라고요. 그 글에 무척 감동했습니다. 저는 ‘요점’만 적어보냈을 텐데, 하하.